그 여자애의 집으로 향하는 골목 어귀에는 300년도 더 됐다는 아름드리 회화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. 거기, 아래서 세 번째 가지쯤에 올라가 앉아 기다리면 집으로 돌아오는 여자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. 단발머리 아래로 보이는 얼굴은 때로 시무룩해 보이기도 했고 때로 뭔가를 깊이 생각하는 듯 심각해도 보였지만 대개는 햇빛을 머금은 것처럼 맑아 보였다. 아주 어렸을 때 고향집 뒤안 장독대에서 보곤 했던 수선화를 닮아 있었다. 어우, 유치해, 할 만한 표현이지만 정말 그렇게 여겨졌으므로 어쩔 수 없다. 그 즈음 일 주일에 두세 번, 나는 여자애를 보기 위해 회화나무 위에 올라가 앉아 있다가 아스름이 어둠이 내릴 무렵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.
여자애를 처음 본 건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거주하던 그 작은 도시의 번화가 뒷골목에 있던 헌책방에서였다. 반 타의로 다니던 학교의 반반한 교사들의 반듯한 관습에 따라 수학시험지 같은 아이1로 분류됐던 내가 그 때 헌책방에 간 것은 필시 운명이었을 것이다, 고 지금도 믿는다. 물론 책을 사려고 거기엘 갔을 리는 만무하다. 나와 비슷한 문제를 짊어지고 살던 친구 둘과 함께 참고서를 팔아먹기 위해 간 거였다. 단골이라는 이유로 시세보다 후하게 쳐 준 책값을 받아들고 나오다가 여자애를 발견했다.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까, 그래, 이럴 땐 이런 말이 가장 담백하다. 한 눈에 뻑 갔다.
"아, 마침 잘 왔다. 부탁했던 게 이거 맞지? 재수 좋다 야. 밑줄 하나 안 친 새 거야."
책방 사장이 책을 들어보이며 여자애에게 그랬다. 그건 방금 내가 팔아먹은 <수학의 정석 2>였다. 그러고 보니 시세보다 책값을 후하게 받을 수 있었던 건 단골이어서가 아니라 밑줄 하나 안 친 거라서였다. 친구들 손에 이끌려 나가면서 나는 여자애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. 수선화였다. 진부한 은유지만, 꼭 그거였다.
고향집 뒤안 장독대 옆에는 군락을 이룬 수선화가 봄마다 흐드러졌다. 노란 빛무리가 앞마당까지 흘러넘칠 것만 같았다. 그 노란 꽃그늘 아래 앉아 눈을 감고 있으면 눈거풀 위로 불그레한 햇빛이 일렁였다. 코 끝에 아찔하도록 감겨들었던 냄새가 필시 수선화 향기였겠지만 그게 햇빛 냄새라고, 나는 어린 마음에 새겨 두었었다.
이성에 관한 한 돌맹이나 다름없던 시절이었다2. 그 여자애를 발견하고 나서야 지구 위의 반이나 되는 여자라는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다, 는 말에는 추호쯤의 거짓은 섞여 있겠지만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.
빨리 가자며 보채는 친구들을 먼저 보내고 헌책방 출입구가 보이는 골목에 자리를 잡았다. 무얼 어쩌야겠다는 작정이 선 것은 아니었다. 그저 여자애의 얼굴을 잠시라도 더 보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. 얼마 지나지 않아 책방을 나서는 여자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. 눈치채지 못할 만한 거리를 두고 여자애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. 친구 녀석들이 봤으면 등신 소리 듣기 딱 좋을 상황이었지만 여자라는 존재를 방금 전에 인식한 남자애가 낼 수 있는 용기는 그 정도가 다였다.
여자애는 참 느리게 걸었다. 뭐 볼 게 그리 많다고 상점 쇼윈도마다 머물렀다. 여자애가 멈춰서서 들여다보던 쇼윈도를 나도 들여다보았지만 그닥 볼 만한 거리곤 없었다. 여자들이란, 참.
손부채를 만들어 연신 얼굴을 부치며 여자애가 걸어오고 있었다. 이미 한여름이었고 내가 회화나무 가지 사이에 둥지를 튼 지 한 달쯤 될 무렵이었다. 가끔 불어오는 실바람에 회화나무 이파리들이 눈에 띌 만큼만 흔들리는 무척 더운 날이었다. 회화나무 그늘 아래 들어서며 여자애는 잠시 멈추나 싶더니 뜻밖에도 위를 올려다보는 거였다. 나는 너무 놀라 하마트면 미끌어져 떨어질 뻔한 몸을 가누느라 정신이 없었다.
"원하는 게 뭔데?"
다짜고짜 여자애가 그렇게 물었을 때, 나는 두 팔로 나뭇가지를 보듬은 채 발 디딜 곳을 찾아 바둥거리다 가까스로 자리를 잡고 설 수 있었다.
"이거야?"
여자애가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내들고 흔들며 짜증나 못 견디겠다는 투로 다시 물었다. <수학의 정석 2>였다. 여자애가 내 존재를 그렇게 구체적으로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. 어쩔 수 없게 됐음을 깨달은 나는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여자애 앞에 섰다. 가까이서 보니 까만 눈망울이 차마 마주볼 수 없을 만큼 예뻤다.
"어따 대고 반말이야?"
눈길을 피하며 기껏 한다는 소리가 그거였다는 게 순간적으로 몹시 속상했다.
"거따 대고 반말이다, 왜? ㄷㅇ고등학교 1학년 3반 에이치에스엠. 니 이니셜 아냐? 보지도 않을 책에 유치하게 사인은."
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. 상대가 남자애였다면 콧잔등을 갈겨주기라도 했을 텐데, 싶은 마음만 굴뚝 같았다.
"너, 어제도, 그제도, 그 며칠 전에도 저기 앉아 있었던 거 모르는 줄 알어?"
회화나무 위를 눈으로 가리키며 여자애가 따지듯 물었다. 거기 앉아 있든 말든! 하고 싶었지만 꿀꺽 안으로 말을 삼켰다. 내가 생각해도 유치찬란한 대거리였다. 일없이 여자애의 결 고운 머리카락을 눈으로 더듬고만 있었다. 친구 녀석들한테 등신 소리를 들어도 할 말 없겠다 싶었다.
"원하는 게 뭔데?"
"팥빙수 먹을래?"
무심코 튀어나온 말이었다. 나를 노려보던 여자애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어들었다. 어이없다는 웃음 사이로 드러난 하얀 치아가 부시게 고왔다. 회화나무 어느 가지에 매미가 날아와 앉은 모양이었다. 밍밍밍 미얌─. 땀에 젖은 티셔츠가 등에 착 들러붙을 만큼 더운 날이었다. 그리고.
6년.
짧지 않은 시간이었다. 제2차 성장기이자 질풍노도의 시기이자 심리적 이유기였던 시절에 한 여자만을 지고지순, 까지는 아니었겠지만 제법 심혈을 기울여 사랑3했다는 건 내 나름의 순애보다. 그러나.
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. 그런 말이 있더라. 맞다. 첫사랑은 두 번째, 세 번째 사랑을 전제로 하므로 그게 이루어져 버리면4 첫사랑일 수가 없으므로다. 이 통속적 아포리즘에서 나 역시, 그리고 그녀 역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건 그래서 당연하다. 그리고 다행이다. 내 살아 온 궤적을 돌이켜보면, 여자애는 물심양면으로 평탄치 못한 삶을 견뎌내야 했을 것이므로.
20년도 더 된 저편의 기억이 여직 고스란히 남아있을 리 없지만 몇 조각은 여전히 어젯일처럼 선명하다. 그 중에서도 그 해 여름이 저물어갈 무렵의 어느 저녁 광경은.
단골 학사주점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여자애가 보고 싶어져 참을 수가 없게 된 나는 온다 간단 말도 없이 술집을 빠져나왔다. 몇 시간 전에 집 앞에까지 바래다 주고 돌아온 터였는데도 그랬다. 공중전화로 여자애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. 마침 여자애가 받았고 나는 빠르게 몇 마디를 날려보냈다.
"나무에 올라갈 거야, 창문 열어 줄래? 1분, 아니 30초면 돼."
취해 말 안 듣는 몸을 이끌고 회화나무에 기어올랐다. 여자애의 방 창문을 보려면 이전보다 더 높이 올라가야 했다. 고소공포증 따위는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.
거의 꼭대기쯤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보니 창문은 열려 있었지만 여자애는 보이지 않았다. 불 붙여 문 담배가 반쯤 타들었을 무렵, 무성한 이파리들 사이로 여자애의 모습이 자그맣게 나타났다. 여자애는 어둠 너머 회화나무 위, 내가 있을 만한 데를 가늠해 가만히 바라보고 서 있다가 의자에 앉았다. 3초쯤, 여자애는 앉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. 뭘 하는 걸까. 여자애의 어깨가 가볍게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피아노 소리가 어둠을 넘어 울려나오기 시작했다. 보일 리 없는데도 여자애는 얼굴을 들어 정확히 내가 있는 곳을 바라보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나는, 한 순간도 놓치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여자애의 모습과 목소리를, 죽는 순간 마지막으로 뇌리에 떠올라 내 목숨과 함께 사그라들 광경을 가슴에 담기 시작했다.


Trackback
Reply
previous 